순교. 영원 공존
<Martyr ; Coeternity>
유혜숙 사진전
24.09.11~ 09. 21
<오프닝 리셉션: 13일(금) 오후 5시>
Open: 매주 수요일~토요일 ( 13:00~18:00)
일요일, 공휴일( 13:00~16:00)
증거의 씨앗과 음율
신앙에 관한 ‘믿음’을 예기할 때 ‘순교’는 순교자가 신앙과 믿음에 대한 증인으로써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는 기억으로 순교자가 뿌려놓은 ‘증거의 씨앗’이라고 말하곤 한다. ‘증거의 씨앗’ 그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앙을 증거 하는 의미를 포함하며 그리스어로 martyros라는 단어의 어원도 증인을 의미하며 순교자는 신앙과 믿음에 대한 증인으로서 이 죽음을 용기 있게 받아들인다고 읽히고 있다. 이처럼 ‘순교’는 한 명의 고독한 증인으로 증거를 만들어 내고 종교적 역사는 그런 순교의 증거들로 가득 차 있다. 많은 종교인은 순교자들의 고귀한 생명인 ‘순교’를 증거의 씨앗으로 또는 종교적 기록으로 기억해야 할 성스러운 ‘죽음’으로 기억하고 있다.
표현예술에서 순교에 대한 다양한 묘사는 서로 다른 시대에서 ‘성인’으로 등장하며 ‘아이콘’, ‘차용’, ‘도상학’의 개념 등으로 표현예술의 맥락과 시각적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표현예술의 과정은 긴 역사를 가지며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상상력이 풍부한 시각예술을 가리켜 증거 하는 사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와 맥락을 포함하는 사실에 대한 상상이라고 예기할 수 있다. 이러한 정의는 감상자가 사실이 포함하는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실제로 그 중심의 의미는 명확해야 한다.
‘증거의 씨앗’과 음율
시각예술은 인간 표현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시각적으로 표현된 모두가 정리되고 기록되어 있다고 해도 모두가 예술표현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표현적, 기술적, 학술적, 저널리즘과 같이 의미와 맥락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전부는 아니겠지만 대부분 비평가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유혜숙이 전하고자 하는 ‘순교의 기억’은 예술적 가치의 본질은 인식하는 ‘증거’와 상상하고 기억하는 ‘씨앗’으로 표현되고 있다. 작가는 ‘씨앗’ 그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낮은 심도와 낮은 채도로 빛의 ‘음율’을 차용하고 있다. 미세한 움직임으로 가득한 단순한 접근은 석양의 빛을 배경으로 숭고한 ‘순교’를 상징하며 성인을 상징하는 십자가는 유일한 도상의 요소를 보인다. 이 표현의 접근은 그녀가 보여준 이전의 <미륵;영원한 공존> 작업에서와 같은 일관된 시각의 ‘음률’로 보이며 자신이 관심 두고 있는 종교적 이해와 시각적 해석을 사진작업에 불어넣는 놀라운 맥락을 가지고 있다
유혜숙의 사진적 ‘음률’
유혜숙은 가장 미묘하고 복잡한 효과를 위해 빛의 언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했으며 빛의 단순함과 도상의 의미가 내재 된 모호성으로 의도성과 모호함을 의도적으로 대입하고 있다. 모호함의 의미를 읽지 못해도, 그녀의 사진적 ‘음률’을 읽거나 듣는 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럼에도 가장 순수한 예술의 형식은 서정시이며, 다음에는 서사적이고, 극적이며 해설적인 ‘음률’을 내포하고 있다. 대부분의 예술 감상은 분석 이론에 기초하고 있는 것처럼 유혜숙도 미학적 문제들을 가장 단순하고 순수한 형태로 제시하며 순교의 기억을 시각예술과 신성한 도상학의 음률로 그녀의 창조적인 표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글/ 박이찬(사진매체 편집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창세 1.27)
이영춘 신부
『미션』이라는 영화가 있다. 중학교 때 극장에서 큰형과 함께 이 영화를 보았는데 그때 본 여러 장면들이 30년도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물론 그동안 여러차례 이 영화를 다시 보곤 했지만 처음 보았을 때 각인된 장면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십자가에 묶여 이구아수 폭포 아래로 떨어지는 선교사의 모습,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가브리엘 신부의 다부진 모습, 가브리엘 신부가 오보에를 연주할 때 감동어린 모습으로 듣고 있는 과라니족의 얼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자 자신이 사용하던 무기를 끌고 폭포를 우직하게 올라가는 로드리고 멘도자, 과라니족과 선교사들의 평화로운 모습, 싸우러 나가겠다는 멘도자에게 사랑의 힘을 힘주어 말하는 가브리엘 신부의 눈빛, 가브리엘 신부가 성체를 앞세우고 침략자들에 맞서지만 결국 총탄에 맞아 쓰러질 때 가브리엘 신부의 목에서 솟구치는 붉은 핏방울, 등등 수많은 장면들이 여전히 내 영혼에 성스러운 잔상으로 남아 있다.
로드리고 멘도자는 인간의 다양한 성품을 생각하게 하는 인물이다. 그는 전직 용병이자 노예상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애인과 바람이 난 이복동생을 결투 끝에 죽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죄책감으로 죽기만을 바라며 수도원 골방에서 폐인처럼 지낼 때, 가브리엘 신부를 만나 새로운 삶에 대한 용기를 얻고 함께 길을 떠난다. 참회의 의미로 자신이 사용하던 무기들을 그물에 묶어 자신의 등에 지고 동료들과 함께 과라니족을 찾아간다. 과라니족은 자신들을 노예로 팔아넘겼던 멘도자를 보자 칼을 들어 죽이려 들지만 그 행위의 의미를 깨닫고 그 칼로 멘도자의 무거운 짐의 끈을 잘라준다. 과라니족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멘도자는 과라니족을 위한 선교사로 거듭나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는 과라니족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일에 거침없이 행동한다. 식민지 지배자들이 침략해 올 때 과라니족과 함께 무기를 들고 싸우러 나가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로드리고 멘도자가 사용하던 칼이 있다. 그 칼은 멘도자가 용병일 때 사용하던 칼이었고, 노예로 팔기 위해 원주민들을 잡아 갈 때 사용하던 칼이었다. 또한 이 칼은 질투심으로 동생을 죽인 칼이었다. 그러나 회개를 위해 자신이 짊어져야 했던 칼이기도 했고 자신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칼이기도 했다. 식민지 지배자들이 침략해 올 때 원주민 소년이 물속에 잠긴 이 칼을 도로 찾아내 멘도자에게 주는데 이때의 칼은 자신이 노예로 잡아다 팔았던 그 과라니족을 위해 싸우는 칼이 되었다. 이 칼은 멘도자가 어떤 모습의 인간으로 있느냐에 따라 그 쓰임새도 달라지는 칼이었다. 멘도자가 칼을 겨누고 있는 모습의 영화 포스터가 인상적이다. 이 칼은 무엇을 겨누고 있는가? 겨누는 대상은 멘도자가 어떤 상태의 인간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질투심 끝에 동생을 죽인 후, 죄책감에 괴로워 수도원 골방에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멘도자에게 가브리엘 신부는 겁쟁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뭘 아느냐고 따지는 멘도자에게 가브리엘 신부는 거룩한 입술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하느님이 주신 자유의지로 동생을 죽였고 죄어 지었소. 그 자유의지로 좋은 일을 해보지 않겠소? 용기를 가지시오. 할 수 있습니다.” 이 거룩한 입술에 감화된 멘도자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좋은 일에 쓰기로 결심한다. 그때부터 이제 그가 사용하던 칼 또한 좋은 일을 하는 칼이 되었다. 멘도자를 따라 성스러운 칼이 되었던 것이다.
원래부터 좋은 것 나쁜 것이라고 구분지어진 것은 없다. 다만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이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 성경은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한 인간의 모습 안에는 추악하고 죄스러운 면도 있지만 인성을 뛰어넘는 성스러움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셨다. 가브리엘 신부의 말처럼 하느님이 주신 자유의지라는 선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간 안에 여러가지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인간이 누리는 자유의지가 하느님 주신 선물이라면 선물을 선물답게 사용함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 아닐까?
2021년 3월 11일 전북 완주군 이서면 초남이성지 인근 바우배기에서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복자 권상연 야고보,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유해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는 하느님이 주신 또 하나의 선물이었다. 하느님이 주신 선물, 그 자유의지를 성스러움의 도구로 사용했던 분들의 유해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 유해는 그분들 삶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윤지충 복자의 목뼈에 드러난 참수형의 흔적, 윤지헌 복자의 유해에서 드러난 능지처참의 흔적은 성스러움 그 자체를 드러내었다. 그 성스러움을 바라보는 우리 또한 그 성스러움에 자연히 녹아들어감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의 성스러움은 우리 영혼안에 지니고 있는 성스러움을 다시 일깨워주는 촉매제이다.
유혜숙 작가는 바우배기 그 현장에 있었고, 그 현장에서 성스러움의 전율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유혜숙 작가는 그 성스러움의 파도가 더욱 일렁일 수 있도록 줄곧 현장을 찾아 그 일렁임을 카메라에 담았다. 순간의 포착이요 정지된 화면같은 사진, 그러나 그 안에는 영원성을 담고 있는 일렁임이 있다. 포착된 성스러움이 여전히 파도가 되어 일렁이고 있다는 말이다. 유혜숙 작가의 시도와 노고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유해숙 작가가 느꼈던 그 성스러움운 일렁임이 또 하나의 파도가 되어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자유의지에 성스러움의 파도로 전해지길 바란다.
2024년 8월 작렬하는 햇빛과 그늘의 경계에서
작업노트 / 유혜숙
‘우리의 삶이 영원하리라’라는 확신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섭리가 없었다면 그 길은 싶게 갈 수 없는 길이리라. 순교(Martyr)는 하늘로부터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입었다는 확신이 들 때 가능한 일이리라 생각한다.
내 고향 전주는 순교의 땅이다.
2021년 3월에 나는 ‘초남이’ 성지 미사 후 ‘바우배기’에 있었고 200여 년 만에 한국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이신 윤지충 바오로와 복자 권상연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는 순간을 보게 되었다.
다음날 석양 녘에 파헤쳐진 그 현장을 찾아 주변을 돌아보며 그분들의 삶과 닮아 있는 남겨진 빈 대지를 먹먹하게 바라보며 사진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도 붉은 동백꽃이 필 무렵이면 늘 치명자산 유항검복자 가족묘지를 찾으며 ‘순교’의 깊은 뜻을 마음에 새기며 사진 작업을 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 최초의 순교자 터가 바라보이는 전동성당 지하에서 성곽을 쌓았던 돌과 성곽 넘어 바라보이는 그날의 하늘을 상상하곤 한다.
‘사람 안에는 영원을 그리는 마음이 새겨져 있다’라고 믿는 나에게는 순교 그 자체가 신념에 관한 예술이고 예술은 그 기억을 살려내는 수단이라는 생각이다. 순교를 어떻게 마주하고, 상상하고 사진언어를 통해 ‘기억해야 할 타인의 죽음’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라는 고민이 이번 사진 작업이며 이미 발표한 미래불인 미륵불 작업 이후 두 번째 영원공존(Coeternity) 연작이다. 나는 부모 형제를 여의고 거친 하늘과 바람 속에 남으로 남으로 내려간 초남이 아기들을 생각하며 이 전시를 그분들께 바치려 한다.
유 혜숙(YU HAESOOK)
전주출생.
서울가톨릭대학교 졸업
전주대 문화산업대학원 사진전공 졸업
개인전
2024년 9월: 순교 아트갤러리전주(전주아트센터)
2019년 8월: 미륵(영원한 공존) 아트갤러리전주(전주아트센터)
2019년 9월: 미륵(영원한 공존) 갤러리 밈(서울 인사동)
그룹전;
2018년~ 2023년: 사)현대사진문화연구소 그룹전 참가
2023년 10월: AP-9 단체전 ‘땅의 이데아’(갤러리탄/ 대전)
2023년 5월: AP-9 단체전 ‘땅의 이데아’(아트갤러리전주/ 전주)
2022년 12월: AP-9 단체전 ‘땅의 이데아’(갤러리더씨/ 서울)
2022년 10월: 전주국제사진제 기획전(코너-2) 참가
2021년 12월4일: KLPF 세미나 참가 (온라인 국제전시관)
2018년 5월: 전주국제사진제 참가(전주로컬문화사진전)